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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괴델

last modified: 2014-10-07 19:07:38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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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논리학의 거장. 불완전성 정리전성 정리라는 이상한 정리를 증명하고 상대성 이론에서 괴델우주를 고안, 연속체 가설 연구, 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려한 괴델의 존재론적 논증 등 여러가지 분야에 업적을 남긴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다. 현재의 체코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어릴때부터 Herr Warum(Mr. Why) 로 불릴정도로 궁금증이 많고 질문을 많이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선천적으로 병약했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자신의 건강에 크게 신경썼다. 학문에 대한 흥미 덕분에 대학입학 당시 이미 철학, 물리학등에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쌓은 상태였으며, 특히 수학의 경우 학부수준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고 한다.

24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학의 공리적 완전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다비트 힐베르트 에게 참과 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공리가 존재한다는 불완전성 정리로 프로그램을 무너뜨린뒤 당대 권위있는 학자들에게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들었다. [1] 힐베르트의 식주의는 네덜란드 수학자 라우어관주의와 한창 크게 싸우던 중이었고, 힐베르트의 형식주의가 여기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체계 자체의 무모순성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힐베르트 팀은 이에 대해 전력으로 연구를 거듭했는데, 이때 브라우어는 자연수를 포함한 체계의 무모순성은 증명불가능할거라며 헛수고라고 천재적인 직관력으로 이미 언급을 하였다. 하지만 증명은 없었다. 브라우어는 후에 빈 대학에도 초청되어 하루 강의를 했었는데, 괴델과 비트겐슈타인은 이 강의를 들었었다. 이때 브라우어의 위 주장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강의 이후에도 하루동안 브라우어와 함께 하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후에 이 만남이 철학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괴델은 어찌 보면 컴퓨터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볼수도 있는데, 이는 불완전성 정리 증명시 사용된 방법론에서 최초로 '알고리듬의 집합' 개념을 정의하여 사용했던것에 기인한다. 그 몇년 후 발표된 앨런 튜링의 튜링 머신은 사실 괴델의 저 알고리듬 집합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튜링은 저 튜링 머신을 이용하여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해보이기도 하였다.

수학 역사를 통틀어도 비견될만한 것을 찾기 힘든 불완전성 정리같은 대정리를 발표하고서도 오스트리아에서는 교수직을 받지 못하고, 결국 1940년대에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가 되었으며 아인슈타인과 물리학, 철학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친밀하게 지냈다. 기록에는 아인슈타인의 연구활동이 저조하던 시기에 아인슈타인이 "퇴근하며 그(괴델)와 함께 걷기 위해 사무실에 나간다"라고 했을 정도로 상당히 친했다. 미국 시민권을 받을 때도 아인슈타인이 추천을 해줬다. 하지만, 시민권 시험을 위해 미국헌법을 공부하다가 그 비논리적인 체계에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2]

1940년, 괴델은 기존 집합의 공리로는 연속체 가설을 반증할 수 없음을 증명했고, 그로부터 23년 후 1963년 폴 코헨(Paul Cohen)은 기존 집합의 공리로는 연속체 가설을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참고로 게오르그 칸토어는 연속체 가설을 연구하다 정신줄 놓아버린 후 '셰익스피어 원저자 프랜시스 베이컨설'을 주장했고, 괴델은 '미분을 발견한 것은 어디까지나 라이프니츠이며, 아이작 뉴턴은 라이프니츠를 표절했다'고 진지하게 주장했다.(...)[3]


말년에는 피해망상증에 걸려 누군가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생각에 아내가 만들어 주는 음식만을 먹다가 아내가 입원을 하자 굶어 죽었다. 죽은 당시의 몸무게가 약 29.4kg으로 30kg이 채 안됐다.

마법선생 네기마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캐릭터가 나온다. 그쪽도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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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괴델 본인은 이 찬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 [2] 시민권 획득 과정으로 판사앞에서 미국 법체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 면접이 있었는데, 바로 미국법의 비논리성을 역설했고 당연히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물론 미국 시민권 획득을 도와주었던 친구 모르겐슈테른과 아인슈타인은 당연히 그 이론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복두장이처럼 결국은 말하고 말았고 아인슈타인과 모르겐슈테른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를 가로막았다. 친구들의 민첩한 행동 덕분에 무사히 괴델은 시민권 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 [3] 뉴턴의 미분에 대한 발표는 1687년도이고, 라이프니츠의 발표는 1684년이었다. 공식적인 발표로 보면 라이프니츠가 빠르다. 하지만, 뉴턴은 1666년도에 이미 작업에 착수하여 라이프니츠보다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1674년도에 작업에 착수하였기 때문에 결국 비공식적인것으로 따져보면 뉴턴이 빠르다. 그러나 비공식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이기에, 그대로 갔으면 공식적 미분의 발견자 칭호는 라이프니츠가 가져갔을 것이다. 뉴턴은 이에 대해 불복하고 라이프니츠를 표절로 고발한다. 이는 곧 크게 번져 오랜기간 대륙과 섬 학계가 등을 돌리는 원인으로까지 발전한다. 사실 이에 대해 오늘날에도 뭔가 이렇다할 결과가 나온 것은 없다. 다만, 라이프니츠가 공개한 발견과정 문서들로 미루어보면 기호부터 시작하여 뉴턴의 전개방식과 매우 다르다.(뉴턴은 미분이 먼저지만, 라이프니츠 방식에서는 적분이 먼저 등장한다.) 결국, 독립적으로 전개해나갔다는 것은 그다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뉴턴이 주장하는 것도 실제 베낀게 아니라, 뉴턴의 이러저러한 편지들을 보면서 아주 근원적인 수준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것인데, 이것은 당연히 사람 머리 속을 해부해봐도 알기가 힘든 것이다. 즉, 그냥 독립적으로 발견했고, 비공식적으로는 뉴턴이 빨랐고 공식적으로는 라이프니츠가 빨랐다 정도로 알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참고로 고등학교 수학에서는 라이프니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뉴턴 방식은 현재는 뉴턴의 본마당인 물리학과에서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