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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및 고정관념/역사

last modified: 2015-04-10 02:18:1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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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편견 및 고정관념의 예시 목록. 예시들 중에는 완전히 틀린 새빨간 거짓말도 있지만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다. 또한 실제로 편견 및 고정관념에 해당하는 것도 있지만 단순 루머도 포함되어 있고, "오해와 진실" 류의 흔한 잘못된 통념을 반박하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실제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어라, 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싶은 항목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든, 리그베다 위키는 개인의 주관이 반영될 수 있으며 온전히 전문적이지 못한 위키이다. 이하의 목록은 단지 새로운 지적 탐구의 동기부여가 되어야 할 뿐이다. 더불어, 전문적이지 못하거나 도리어 엉터리에 가까운 거짓 해명이 실제 정확한 사실들 사이에 뒤섞여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편견 및 고정관념
인류 사회 과학 역사 문화 예술 종교

Contents

1. 한국사
2. 세계사
2.1. 전근대
2.2. 근대
3. 문헌


되도록이면 시대순으로 정리 바람.

1. 한국사


  • 우리 민족은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이 없으며, 수천 년간 침략만 당해온 평화적 민족이다.
    • 이게 별로 좋은 것도 아닌데 많이 믿고 있는 편견. 아마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전근대 시기에 가장 유명한 전쟁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고 고조선과 조선을 멸망시킨 국가도 중국, 일본인데다가, 2014년까지를 기준으로 가장 최근에 벌인 전쟁인 6.25전쟁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라 이런 인식이 생긴 거 같은데 역사상 계속되는 영토의 확장과 축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축약해 놓았으며, 이 말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수천 년간 두들겨 맞았으며 머리도 나쁜 호구 민족이라는 소리로 보인다. 사실 실제 한국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두들겨 맞은 적도 많지만 먼저 선빵을 때리거나 신나게 두들겨 팬 경우도 꽤 있다.
    • 현대의 입장에서 전쟁을 벌이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건 현대의 관점이고, 국익이 될 때는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 또한 좋은 국가의 조건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자. 당하기만 하면 평화의 민족이라고 볼 수 없다. 한반도 국가 중 가장 온건한 수준의 대외관계를 유지하던 조선조차 변경 여진족들이 강성해질 조짐만 보이면 인정사정없이 바로 밀어버렸다.

  •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속국을 자처한 한국의 역사는 굴욕적이다.
    • 이것 역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일본같이 섬나라라면 모를까,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부터 고려·조선같이 중원에 가까운 나라로서의 중국과 이런 관계를 가진 건 지극히 당연했다.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한건 현명한 처사였다. 게다가 중국 왕조도 북방 유목민족에게 조공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외에도 실익성이 있기도 하였고. 조공사대주의 항목을 참고.

  • 우리 민족은 동이족(東夷族)이다.
    • 동이족은 단순히 ‘중국’에서 보기에 동쪽에 존재했던 민족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한민족’은 거기에 속했던 것뿐이기에 우리 민족 = 동이족 식의 사고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나마 동이족이란 단어는 본래 은주 시대에는 산둥 지방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후대에는 계속적으로 변화한다. 동이 항목 참고.

  •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갖고 있다.
    • ‘과거’ 역사 갤러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세계에서 반만년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밖에 없다. 신화상 연대인 기원전 2333년[1]으로 따져도 5000년보다 4000년에 가까우며 2167년 이후에는 이 문구 수정바람 실제 고조선이 역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높이 쳐서 기원전 7 ~ 8세기부터이니 5000년의 반밖에 안 된다. 청동기시대를 기준으로 삼아도 무리수이기는 마찬가지. 덧띠무늬새김토기 등의 발굴 이후로 기원전 20~15세기를 청동기에 편입하려는 학자들도 있지만 토기가 바뀌었다고 청동기가 열리는 게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현재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청동기가 발굴되는 것은 실제 ‘청동기 시대’로 불리는 시대 중에서도 후반부이며 이 때문에 ‘한국사에서 청동기시대를 굳이 산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제기된 바 있다(물론 식민사관의 청동기 부재론과는 다른 문제이다). 가뜩이나 세계사에서 청동기시대의 비중이 줄어가는 추세라…….

  • 개마무사는 허구이며 고구려 고분 벽화에 과장되게 그려진 산물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말이 갑옷 무게를 버티지 못한다.
    • 북한 지역은 아니지만 1992년 6월6일 경남 함안군 가야읍 해동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실제로 마갑이 출토된 바 있다.#

  • 서동요의 내용은 사실이다.
    •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금제사리기(金製舍利器)와 함께 발견된 금판에는 서동요 내용과 상반되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때문에 현재 논란중인 상황. 부인이 여러명 있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고, 완전히 설화라는 주장도 있다.

  • 일본 왕실과 가장 먼저 연이 맺어진 것은 백제 왕실.
    • 실제로는 신라 왕실이 가장 먼저 일본 왕실과 연이 맺어졌다. 그 주인공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사흔.[2]

  •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반역자이다.
    • 현대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보니 생기는 오류. 사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어느정도 동질성이 있긴 했지만 같은 민족이나 운명공동체로서의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민족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이 세 나라와 고대 일본도 거의 민족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김춘추가 당나라와 연합한 이유는 단순이 신라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일찍이라도 몽골 침략기 늦으면 근대 이후에나 정착된 민족이란 개념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무시한 채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분명한 논리적 오류이다. 이런 논리로라면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 존속한 남한은 민족반역자들의 국가라는 소리가 된다. 김씨 왕조와 일부 종북들의 주장이기도 하고 그리고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모든 국가는 반인류 단체가된다(…).

  • 삼국사기는 사대적이고, 삼국유사는 자주적이다.
    • 애초에 삼국사기는 설화집이 아니고 삼국유사는 정사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무리지만, 삼국사기 자체로도 사대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고려사가 고려의 왕들을 세가에 기술한 데 반해 삼국사기는 삼국의 왕들을 본기에 기술에 놓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3] 다만 김부식의 혈통 때문인지 신라를 띄웠다는 소리는 듣는다. 삼국유사에서도 자주적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내용이 자주 나온다. 승려였던 일연은 대놓고 연개소문을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 멸망을 위해 환생한 존재라며 디스하기까지 한다. 두 역사서 모두 고구려나 발해 등의 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할 수 없었던 탓도 있긴 하지만……. 아니, 애초에 역사서에 사대적이니 자주적이니 하는 드립을 치는 게…….

  •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국가이다.
    • 정확히 말하면 말갈계와 혼합된 국가이다.[4]

  •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이라서 흰 옷을 입었던 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 흰 옷을 입었다.
    • 고려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흰 옷 좋아했다는 기록이 멀쩡히 남아 있고, 정부에서는 ‘동방이니 청색 입어야 안 되냐’고 하면서 청색을 입히려고 자주 시도했지만 실패.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의금지령까지 내린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 섬유 제조 기술 및 양, 세탁 기술을 감안해서 때 타기 쉬운 흰 옷이 얼마나 번거로웠을지 생각해 보자. 게다가 백색 안료는 원래 귀한 탓에 염색 비용도 비쌌다. 즉 예나 지금이나 비싼거 좋아하는건 사람의 본능적인 심리라는 것 이런 옷을 좋아한 게 아니면 왜 굳이 입었을까?. 애당초 삼베, 모시를 뽑으면 상아색 가까운 색이 나오지 순백색이 나오지 않는다. 누가 염색 기술이 없어서 흰 옷 입었대?[5][6]
  • 上曰:“玉色, 國初所尙, 然高麗人好着白衣之言, 見於中國史傳。……”

    임금이 말하기를, “옥색은 국초(國初)에 숭상하던 것이나, 그러나 고려(高麗) 사람이 흰옷을 입기 좋아한다는 말이 중국의 사전(史傳)에 보이고……” - 세종실록 91권

    令朝官士人, 着黑色衣, 禁白色衣。 東方之人, 自古尙白, 國典雖有白色之禁, 而因仍成習, 莫之變, 上思以易之, 遂定是制。
    조정의 관리와 사인(士人)으로 하여금 검은 옷을 입게 하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금하였다. 동방 사람은 예로부터 흰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국법에 흰색을 금하는 법이 있기는 하나 그대로 습속이 이루어져서 바꾸지 못하였는데, 상이 바꾸고자 하여 이에 제도를 정한 것이다. - 현종실록 19권

  • 성리학자들이 세운 조선사대주의에 쩌들어 옛 한민족의 자주적인 기풍을 말살한 수구 꼴통, 유교 탈레반 국가이다. 적어도 후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 조선 개국으로부터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유학자들이 매우 수구적이고 뜬구름만 잡는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한반도의 성리학자들이 등장한 고려 말에는 기존 고려 지배층이나 거기에 빌붙어 살던 구 유학 세력, 불교 세력보다 훨씬 개혁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세력으로, 여말에 가장 성공적인 개혁을 완수한 것도, 종국엔 500년 간 존속하던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도 이들이였다. 당시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자로 자타공인되고, 그 문화는 동아시아의 모범으로 여겨지는 시기로, 개혁 세력이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를 수용한 것은 요즘 한국에서 구미 선진국들의 사례를 참고하고, 적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조선은 태생부터 성리학 국가였던 탓에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을 억제하고, 이 과정에서 몇몇 큰 사건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단순히 사상의 충돌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 겹쳐 있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숭유억불의 경우 고려 말기 사찰의 타락이 영향을 미쳤고[7], 가장 큰 가톨릭 박해였던 병인박해의 경우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상황과 큰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또, 여기서 불교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인식이 나아져[8] 조선 후기 사찰 건립에 관과 지방 사족들의 협조도 찾아 볼 수 있다.

  • 우리나라가 일본에 뒤쳐진 것은 조선의 책임이다.
    • 어느정도까지는 맞는 말이다. 허나 일본의 혼슈지방만 해도 단순한 면적 뿐만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연속적인 평지, 습지 면적 또한 한반도와 비교해 넓고, 기후대 또한 농사에 더욱 유리하다. 이런 요인들이 점점 누적되면서 조선시대에 결국 일본이 한국을 추월한 것이지 조선 위정자들의 실패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 에도 시대 이전에는 일본의 통일된 정권이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오래 간 정권이 없었기에 섬 안에서 싸우기 바빠 생산성이 충분히 발휘 되지 못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열고 260년 동안 평화가 지속 되어 인구가 크게 늘고 한반도보다 넓은 땅과 좋은 기후의 진가가 발휘 되었다고 보면 된다

  • 언문(諺文)은 양반층이 훈민정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 그저 한문을 그 이상으로 중히 여겼을 뿐 언문이란 말 자체에 비하 의도가 포함되었다고 여기긴 힘들다. 세종부터 훈민정음을 언문으로 지칭했으며 양반층이 훈민정음을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 한국에 중층건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조선 전기에는 중층건물에 대한 기록이 잘만 등장하는데 이런 중층건물은 양란 전후에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 조선이 중층건물을 짓는 것에 소극적이였던 이유는 몇가지로 의논되는데, 1. 17세기 소빙하기(경신대기근 항목 참조)를 견디기 위한 온돌 사용의 확장(한옥 구조상 온돌은 1층에만 설치할 수 있으므로 2층 이상은 추워서 생활이 어렵다.)과 한반도 인구의 증가, 그로 인한 목재의 부족, 2.상하의 예를 중시하는 유교의 관념으로 건물 규모가 제한되었다. 3.산이 많은 한반도에서는 고층 건물을 피하고 낮은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풍수지리적 인식 등이다.

  • 조선시대 양반들은 주로 와집에서만 살았다.
    • 의외로 청백리(淸白吏)나 빈자를 자임하거나 원래 가난했던 양반들은 초가집에서 살았던 경우도 있다.

  • 조선시대 양반은 죽을 때까지 양반 계급일 것이다.
    • 조선시대는 (이상적으로는)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등한 양천제였다. 애당초 양반이란 말 자체도 원래는 과거에 합격해서 문반이나 무반이 된 관리들에게 붙은 칭호였다. 즉, 근원적인 의미는 문무양반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평민도 과거에 급제를 해서 관직에 오르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대역죄 등으로 몰락한 경우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후손도 천민 계급으로 격하되는 건 물론이고,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사람이 없거나, 돈 없으면 평민이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았다. 박지원반전을 보자. 괜히 족보를 샀을까?
    • 양반 가문에서 3대째까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면 양반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래서 양반들이 과거에 목숨을 건 것이다. 초시라도 붙어야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양반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 냈다. 학생들과 관료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다는 사실이 와전된 사례. 흥선대원군의 개혁책 중 하나인 호포제 또한 양반들에게 군포를 징수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 양반들의 경우는 저 법률을 악용해서 세금을 안내려고 하기는 했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긴 했다. 단적인 예가 서원향교에 학생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원래 과거 응시생 보호책이지만, 나이 80에도 과거 응시하던 조선시대에는 죽을 때까지 향교와 서원의 학생으로 지내곤 했다. 제사를 지낼 때, 위패 대신에 쓰는 지방을 보면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현고 학생부군 신위 顯考 學生父君 神位'라고 적히는데[9], 저기서 학생이 바로 향교의 학생이라는 의미이다[10]

  • 조선시대 평민이나 천민들은 모두 문맹자(文盲者)들이다.
    • 조선 시대의 평민들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었다. 한 프랑스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웬만한 평민들의 집에는 책이 있어 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양반들만큼 숙달된 한문사용자들은 아니고, 천자문이나 소학 정도 수준을 읽는데 그쳤을 것이다. 다시 한번 세종대왕님께 고마움을 느끼도록 하자

  • 조선시대 암행어사들은 한번 출도하면 대규모 병력이 들이닥치며 "암행어사 출도요!" 를 요란하게 외쳤다.
    • 사실 이런 사례는 오히려 적었고, 대부분의 경우 간단히 신분을 증명한 후 즉시로 동헌의 자료를 전부 받아서 감사를 수행하곤 했다. 또한 부랑하는 민간인을 만나면 즉시로 신분증을 까고(…) 임금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역할도 맡았다. 정말 악질 탐관오리이거나 지방 관리가 암행어사를 상대로 농성 등 전투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면 그처럼 요란스럽게 들이닥치는 사례는 적었다.문화재청 참고자료

  • 훈민정음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 세종대왕 거의 혼자서 만들었다. 집현전은 훈민정음 반포 후 해례본을 만들었을 뿐이다.

  • 붕당은 단순한 파벌싸움이다.
    • 대표적인 식민사관. 정치싸움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붕당 항목 참조.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게 조총은 본 적도 없는 신무기였다.
    • 16세기 중반부터 조총으로 추정되는 총포를 접한 기록이 나온다. 물론 반짝 관심 정도로 지나갔기에 임진왜란 초 그렇게 고생한 것은 맞다. 여진족이 자주 사용해서 신립 장군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신립탄금대 전투에서의 패배는 여러 삽질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과부적의 영향이 크다. 아니 그러기보다도 임진왜란 직전 서애 류성룡과 신립의 회견에서 류성룡은 ‘우리도 조총을 쓰자’고 말하지만 신립은 ‘그거 쏘면 맞는다요?’라면서 조총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 사실 조선이 조총을 쓰지 않은 이유는 조총보다 더 화력이 강한 승자총통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 행주치마라는 말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의 일에서 유래한 것이다.
    • 최초의 기록은 1517년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로, 행주 대첩이 있기 76년 전 이야기다.

  • 조총을 최초로 개량하여 전술에 응용한 인물은 이순신이다.
    • 항왜 김충선의 건의로 조총이 전투에 활용되었다. 이후 개조와 생산을 거쳐 제식 무기로 투입된다.

  • 북인들은 중립 외교 정책에 찬성했다.
    • 북인들은 중립 외교 정책에 반대했고, 광해군이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대북의 수장 이이첨은 아예 후금 사신의 목을 치자는 주장까지 했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이이첨은 대북의 인물이다. 전 항목에선 유희분이 대북이라 적어놨는데 유희분은 소북의 수장이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본사 여러 신하들의 헌의를 보니, 상경(常經)을 지키고 권도를 행하는 것과 붙들어 두고 단절하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서는 대체로 동일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의 헌의는 ‘명나라에 품윤을 하지 않고 대국의 원수와 사사로이 서로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고 하였고, 유희분(柳希奮)의 헌의 또한 ‘너희들이 만약 지난 일을 깊이 사과하고 명나라로 귀순한다면 양국의 옛 호의를 서로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변방 장수에게 글을 만들게 하소서.’하였습니다. 이 두 신하의 헌의가 서로 다른데 저희로서는 감히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라 주상의 재가를 여쭙니다.” - 광해군일기 139권
    사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광해군 중립외교의 구체적 구상안과, 효용 여부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 홍길동, 임꺽정은 의적이다.
    • 홍길동은 연산군 때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를 의적으로 볼 어떤 근거도 없으며 오히려 절대 의적이 아니다. 하지만 홍길동이 도적질을 하던 시기의 임금이 하필이면 그 연산군이라서 폭군 시대에 활약한 의적이라 하여 오히려 홍길동전에서 버프를 받게 되었고 그런 홍길동전의 영향으로 현재와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임꺽정 또한 홍명희의 소설에서 의적으로 각색되지만, 기록상으로 보이는 행동은 방해가 되면 민간인도 쉽게 쳐죽이거나 권력자에 간접적으로 빌붙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임꺽정이 홍길동과는 달리 백성들을 생각하는 면모를 약간 보인 것은 사실. 홍길동은 자신을 숨겨준 백성조차 기밀 유지라는 이유로 얼굴가죽을 벗겨 죽였고 당대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이 홍길동 같은 놈아!"였다.

  • 조선 500년은 허송세월이였다.
    • 대표적인 식민사관이다. 동시대 서구국가들의 눈부신 발전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전근대 한민족 국가 중 가장 발전된 행태의 나라였을 뿐더러, 내부적으로도 많은 변혁이 있던 시기이다. 지금 이 위키를 무슨 문자로 작성하는지 생각해보자. 삼국시대를 다룬다는 사극들이 시대를 초월하는 고증을 보여주는 것도 영향을 끼쳤을 듯.

  •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흥선 대원군에 의해 옥사했고 지도 목판은 모두 소각됐다.
    •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당대 기록도 없을 뿐더러, 김정호의 지도 제작에 큰 도움을 준 신헌과 같은 조정 관료들이 이 때문에 처벌당했다는 증거도 없다.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기록은 일제강점기부터 나오기 시작하며 대동여지도 목판은 대량으로 발견됐다. 이 떡밥은 최남선의 글에서나 시작된다. 그리고 일제가 그걸 교과서에 실어서 ‘대원군이라는 양반이 워낙 꽉 막힌 양반이서리……’운운하며 날조했다.

  • 병인양요 당시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로 건너갔다.
    • 조선 말기에 상인들 손을 몇 번 거쳐 프랑스에 넘어갔다. 병인양요 당시 건너간 것은 외규장각 도서 340여 권.

  • 신미양요 당시 조선은 굳건한 수비력으로 미국을 격퇴했다. [11]
    • 무너졌다. 그것도 아주 처참히. 다만 흥선 대원군의 완강한 태도와 미국 국내의 사정 등으로 인해 미군은 퇴각해야 했다. 병인양요도 다르진 않았지만 신미양요가 좀더 심했다. 이건 그냥 미국이 실용성이 없다 판단하고 철수한 것이지 물리친게 아니다. 프랑스와 영국 경우에도 거문도를 점령하거나 철수하는 등 자잘한 전투를 벌이면서 조선에서 실익이 없다 판단하고 철수한 것이다..

  •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는 개화를 반대하는 인물이었으며, 수구파의 시대착오적 앞잡이였다.
    • 홍종우 항목 참고. 그는 한국 근대사에서 극히 저평가된 인물로, 온건개화파에 속했으며 심지어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있다. 그곳의 카페에서 그는 적잖은 프랑스 지성인들과 교류했으며, 동양에 대한 열띤 관심에 힘입어 파리 기메 박물관에 한국관을 개관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한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출판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 갑오개혁와 동시에 신분의식도 완벽히 철폐되었다.
    • 신분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한국전쟁 때이며, 일제시대 당시에도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백정들이 형평운동을 벌였던 것을 상기해 보자.

  • 고종명성황후 민씨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자주성을 위해 노력했다.
    • 해당 항목 참조. 확실한 건 2000년대 일반인들의 시각에는 판타지가 많이 덧씌워져 있다는 것이다. 대중 매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보여주는 사례.

  • 구한말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과 의사들은 한국을 사랑했으며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
    • 위의 고종과 다소 비슷한 사례. 게다가 이쪽은 특히나 개신교계에서 밀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사실 호러스 뉴턴 알렌 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이 사람들도 직간접적으로 제국주의적 침탈에 함께한 바가 있다.
    • 흥미롭게도 무슬림의 시각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을 바라보고 평가한 글이 발견되었다. 이희수 교수가 쓴 책 《이슬람과 한국문화》 에 한 무슬림이 쓴 조선 여행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1913년 투르키스탄 출신의 압둘라쉬드 이브라힘(Abdul-Rashid Ibrahim)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던 한국을 방문하고 그의 여행기 《이슬람세계》(Alem-i Islam)에 적은 내용에 따르면, 선교사들이 성찬식을 핑계로 술을 마셨다고 쓰기도 했다.[12] 구체적인 종파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술을 예수의 피라고 믿으며 의무적으로 마신다는 점에서 정교회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가톨릭은 성찬식때 빵만 먹는 경우가 많고,[13] 개신교는 술이 예수의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다만 이브라힘이 기독교 종파의 차이에 대해서 무지하여 개신교의 성찬식을 '아 저놈들 예수의 피라고 믿고 마시는 구만'이라고 오해하였을 가능성이 있다.[14]

  • 방곡령을 선포한 조병식은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던 인물이었다.
    • 오히려 이런 탐관오리였다. 사실 그의 행적에서 방곡령이 오히려 뜬금없어 보일 정도. 본인이 수탈할 곡식을 일제가 가져가서 그런 게 아니냐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 고종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위대하다, 거대하다, 존귀하다" 의 의미로 국호에 대(大)자를 넣었다.
    •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한 한(韓)이라는 의미를 기려 대한제국이라 한 것이다. 이하의 실록 내용도 참고.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 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 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가 개통된 도시는 다름아닌 서울(1899)이다.
    • 광무개혁 항목 참고. 흔히 도쿄보다 빨랐기에 동아시아 최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토가 더 빨랐다(1894, 시치조~후시미 노선). 물론 이 시기에는 노면전차 자체가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최첨단의 교통수단이기는 했지만.

  • 3.1 운동은 종료 시까지 비폭력 무저항 평화 운동으로 일관하였다.
    • 폭력 시위의 양상도 확인되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난 시위인 데다가, 일본 헌병의 강경 진압도 있었는데 비폭력 일관으로 진행되었다는 말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 고정관념이 (한국 입장에서도)별로 바람직한 역사 인식은 아니다.
    • 시위가 무르익고 각 농촌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시위는 더욱더 과격해졌다. 또한 일제의 학살에 가까운 진압에 의한 반작용 역시 원인이 되었다. 농촌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린치를 당하고, 경찰서, 관공서 등이 불타는 등의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 3.1 운동은 국내의 개신교 지식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 개신교 지식인들은 불교계와 함께 나중에 합류했으며, 최초 주도는 천도교였다. 1918년까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전에는 대종교가 있었다.

  • 3.1 운동때 구호는 ‘대한 독립 만세’였다.
    • 해당 항목 참고. 오히려 ‘조선 독립 만세’가 더 많이 쓰였다.

  •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는 탑골공원에서 낭독되었다.
    • 원래는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려 하였으나, 이후 태화관으로 장소가 변경되어 그곳에서 낭독되었다.

  • 민족대표 33인의 32명이 3.1 운동 후에 친일로 변절하였다.
    • 해당 항목 참고. 확실히 변절하였다고 확인된 인물은 단 3명에 불과하다.

  •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였다.
    • 지금까지는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쇼와 일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장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KBS 스펀지에 의하면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 을 던졌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도시락 폭탄은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따로 제작한 자폭용 폭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이전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사(爆死) 미수 때도 폭탄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왕이 살아남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 폭탄은 물통으로 개조하고 도시락 폭탄은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 자폭을 하도록 따로 제작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불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일제는 서울에 건물을 지으면서 하늘에서 봐야만 '大日本'(대일본)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구조로 만들었다.
    • 해당 항목 참고.

  • 일제는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풍수지리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백두대간에 박아놓았다.
    • 역시 해당 항목 참고.

  • 일제는 원래 Corea로 표기하던 우리나라 영문 이름을 Korea로 바꾸어 놓았다.
    • 이 역시 해당 항목 참고.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에 겨운 국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며 일장기를 개조한 태극기를 흔들었다.
    •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8월 16일의 얘기다(…). 8월 15일 당일에는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전해 줄 라디오 설비 자체가 열악했기에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지 못했으며, 항복 직후 곧바로 그날 중으로 군대가 다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온했다. 일본군이 빠져나가고 일제 패망의 소식이 전해져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 지나서였다.

  • 북한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우리나라 정부 초대내각은 친일파들로 득시글거렸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였다.
    •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실제로 제헌헌법을 뒤져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오히려 통제계획경제 모델을 채택하였다. 그가 이것을 폐지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한 건 사사오입 개헌 때에 이르러서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아닌 우창 신석우(1894-1953) 선생이다. 흔히 이 전 대통령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일제에 빼앗긴 국호를 되찾아야 한다" 고 강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거 사실 고스란히 신석우 선생의 발언이다.(…) 해당 국호를 제안할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 전후 일본은 한국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일체의 보상금/배상금을 오늘날까지도 지급하지 않았다.
    • 한일기본조약 문서 참고. 보상/배상 자체는 이루어졌다.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마음에서 우러난 사과가 없었을 뿐이다.[15] 애매한 건, 그나마 그 보상/배상이라는 것도 독립축하금으로 받아서……. 아무튼 현재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더 이상 공식적인 금전적 보상/배상을 할 책임이 전혀 없다.

  • 6.25 전쟁이오시프 스탈린김일성에게 시켜서 일으킨 전쟁이다.
    • 처음에는 그와는 완벽하게 정반대이다. 오히려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괜히 전면전을 일으켜서 미국과 연루되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모스크바에도 똑같이 원자폭탄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김일성의 남침제안을 48번이나 반대했다가 애치슨 라인때문에 허락했다. 그 이후에는 소련이 공식적인 관여를 하지 않는 선에서 지원해주었다. 사실 중국 등 떠밀어서 생색낸 거지만...

  • 1960년대에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았던 필리핀이 우리나라에 기술자를 보내 장충체육관을 지어 주었다.
    • 물론 당시에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았으며, 기술자들도 많이 보내준 것은 사실로 당시 필리핀 기술자들이 지어 주었던 건물은 구 문화체육관광부 청사(現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미국 대사관 등이다. 그러나 장충체육관은 엄연히 한국에서 만들었다. 디자인은 건축가 김정수 선생[16]이, 설계는 최종완[17]이 담당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 측(혹은 진보 측)이 만든 편향적인 단어다.
    • 원래 광주 측은 민중항쟁, 의거 라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쓴 적도 없다. 실은 저 단어는 노태우 정권이 만든 것이다.[18]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의 안전과 존립을 위협할 폭력을 벌인 과격 봉기(uprising)이다.
    • 여기에는 5.18이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5.18은 공수부대의 살육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를 무장하고 저항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저항권" 을 이유로 폭력을 쓴 것. 관련 내용은 김영택 항목도 같이 참고.
    • 이러한 혼동이 악의적이지 않을 경우, 거의 대부분은 "전두환 정권은 헌정사적 정당성이 확보된 정권이다" 라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초래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국민의 대표로서(?) 정당하게 선출된 신군부 세력에게, 일부 내란세력이 반발하여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는 설명밖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도리어 전두환 정권은 부당한 폭력적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국민의 민주적 정치참여를 또 다시 유보시킨, 정당성을 얻기 힘든 내란세력이며, 이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은 반헌법적 내란세력에 대항하여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함으로써 헌법정신의 회복을 도모한 시민 무장투쟁이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위의 정리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면 이하의 대법원 판결문을 읽어볼 것. 이미 역사의 판단은 내려진 상태이고 더 이상 재론의 여지 자체가 없다. 전두환이 일체의 대통령 예우에서 제외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대법 1997.0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문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 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19]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20] 그 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21]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22]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재조사가 필요한 사안이다.
    • 우리나라 역사에서 5.18만큼 조사를 많이 한 사건도 없다. 1980년 계엄사, 1982년 국방부, 1985년 안기부, 1988년 정부, 1988년 국회, 1995년 검찰, 1996년~1997년 사법부, 2005년~2007년 국방부, 2012년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관에서 9번이나 조사했다. 33년동안 매 정권마다 조사 안 한 적이 없는 사건이다. 제5공화국 시절의 조사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사태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했다.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그 민주사적 가치를 공인한 바 있으며, 각 정권에 걸쳐서 33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막과 전말이 충분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5.18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제기하거나 뜬소문을 신봉하는 것은 대한민국 3부의 판단과 역대 각 정권들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대한민국 정부의 합당한 권위와 정당한 판단을 위협하는 언행이 될 수 있다.

  • 천안함은 좌초입니다! [23]

2. 세계사

2.1. 전근대

  • 세상에 1,000년을 간 왕조는 신라와 로마 제국 고대 이집트밖에 없다.
    • 신라 천 년 못갔다. 8년 모자람한국사에 대한 오해와 세계사에 대한 오해의 중간쯤 놓여 있는 말. 신화와 역사가 섞인 고대 왕국을 차치하더라도,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일단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중간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구분하여 무려 1,000년짜리 황조 두 개로 나눌 수 있다.[24]
      사실 이런 구분이 의미가 없는 것이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국가는 유지하되 왕가가 교체되어 사실상의 국가 교체급 사건을 겪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덴노 혈통은 형식적으로는 기원전부터, 실질적으로는 한국사의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나 집권층과 통치 체제는 몇 번씩 바뀐 일본. 베트남의 도 있다.(베트남/역사 항목 참조.) 단순히 ‘왕조’만 따진다면 일본은 2000년 이상 이어오는 왕조를 지닌 국가이며 물론 《일본서기》의 구라 때문에 역사가 연장된 측면이 있지만 이집트의 파라오 왕조 역시 5,000년 넘게 이어오는 왕조이다.

  • 피라미드는 노예들을 채찍질하면서 지어졌다.
    • 일반 노동자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나름대로 존중받은 직업이었다.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오히려 원한다면 휴가도 신청할 수 있을 정도였다.

  •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한번 싸울 때마다 마지막 한 명만 남고 모두가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또는,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신분상 노예였다.
    • 초기의 경우 실제로 죽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유명 검투사의 경우 스타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 노예 출신들도 있었지만 전쟁 포로나 범죄자들도 있었고, 나중에 인기가 좋아지면서부터는 일반인들도 서약을 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

  • 로마 시대 기독교도들은 콜로세움에 설치된 기둥에 묶인 상태로 맹수들에게 뜯어먹혀서 죽었다.
    •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두고 "순교자의 성소" 로 선포하면서 발생한 오해.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역사적 근거는 전무하며 그 이전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콜로세움을 성소로 취급한 경우도 없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도 이런 장면이 그려져서 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 다만 사형의 의미로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베스티아리(bestiari)[25]가 되게 하여 맹수들과 싸우게 한 적은 많다. 이는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형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사자들은 갑옷이나 무장도 없이 방치되고 맹수들은 한도끝도 없이 투입되었다. 이런 형벌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폐지되었다.

  • 네로 황제는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경기를 즐겨 관람했다.
    • 네로 황제 치리 당시에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당시 그곳에는 네로 거상이 있었고(…) 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그걸 밀어버리고 거기에 원형 경기장을 지은 뒤 그 이름을 "콜로세움" 이라고 한 것.

  • 검투사 경기에서 관중들은 패자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1693년판 번역본에 따르면, 유베날리스는 "엄지를 세워 뒤로 젖히면 패자를 죽인다" 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고전학자 존 메이어의 1853년판 번역본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면 찔러죽이라는 신호, 바닥을 가리키면 무기를 버려 살려주라는 신호였다" 고 나와 있다. 루이스와 쇼트가 쓴 라틴어사전(1880)의 "엄지" 항목을 보면 "오므리면 부정이고 펴면 긍정이다" 라고 쓰고 있다.

  •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상대하여 화웅의 목을 베었다.
    • 완전히 거짓이다. 관우와 화웅은 평생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화웅의 목은 손견이 베었다. 나관중이 진짜 여럿 망쳐놨다

  • 흉노훈족은 동일한 민족이다.
    • 전혀 아니다. 발음유사성에서 나온 착각이었지 이 둘과 관련되어진 유사성은 정확히 알려진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한나라의 이간질로 분열되어진 북흉노 남흉노도 서로 다르다시피하다.

  • 과거제도는 한족의 발명품이다.
    • 이건 진실에 가깝다. 과거는 선비족의 풍습이었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별 증거가 없다. 선비족이나 북위가 과거를 실행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있다면 사료를 첨부 바람. 도입시기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중국은 보통 수문제가 현량을 추천하라고 조를 내렸다는 기사("甲戌,詔舉賢良."-<<隋書>>권1, <帝紀>1, 高祖 楊堅上, 開皇二年, 16쪽.)에 의거하여 開皇2年(582)으로 본다. 그 이전엔 구품관인제로 인재를 선발하였다.

  • 포청천이 쓰는 작두들은 목을 치기 위함이다.
    • 오히려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의 도구로 쓰였다.

  • 예수12월 25일에 태어났다.
    • 실제로는 9월 쯤이라고 추측된다. 12월 25일은 로마 시대의 축제랑 결합해서 만든 날.

  • 바이킹들은 투구에 뿔 한쌍을 달았다.
    • 이러한 투구들이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간간히 발견되기는 하나, 실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무리인 수준의 그 크기나 장식의 화려함으로 인해 종교적인 용도로 쓰였다고 생각되며 후대의 미술작품 때문에 더해진 오해로 보인다.

  • 몽골 제국은 무식한 야만인들이 숫자만 믿고 닥치는대로 정복했다.
    • 오히려 숫적으로 불리한 전투가 더 많았다. 몽골 제국이 계속해서 승리를 이루어 낸 것은 징기스칸수부타이같은 유능한 지도자들과 지휘관들의 철저한 계획과 전술 때문이다

  •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서양 세계를 수호한 전투이다.
    • 이건 뭐 병인양요를 가지고 동양 세계를 수호했다는 거랑 다를 바 없는 뻘소리. 그런데 고등학교 세계사에서는 이런 잘못된 사실을 대놓고 맞다고 가르치기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사실 717년 비잔티움 제국콘스탄티노플 방어가 서양 세계를 수호했다고 보는 게 맞다. 여기서 뚫렸다면 700년 먼저 이슬람 주력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왔을 테니까. 물론 제국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통틀어 야만족 취급하던 유럽 세계의 방어가 목적이 아닌 단순한 생존의 문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엄연히 맞는 말이다.

  • 유럽의 중세시대는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인외마경의 암흑시대였다.
    • 로마의 뛰어난 문물들이 상당수 실전되고, 반달리즘의 어원이 된 반달족의 침입을 감안할 때, 당시 서구 유럽은 동시대의 이슬람 중국 문화권보다 확실히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긴 했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사가[26]들은 중세시대가 그렇게까지 문명이 심각하게 퇴보한 시대가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중세 항목 참고. 그 시기에도 문명과 기술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으며, 중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의식 수준이나 생활 여건이 딱히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고대 로마 시대보다 문명적으로 더 발전된 측면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로마를 계승한 비잔틴 제국은 나름대로 발전되어 있었다. 사실 이런 주장은 학계의 보편적인 학설이 아니라 화이트나 드레이퍼 등의 극단적인 몇몇 역사가들이 펼친 주장에 가깝다.

  • 마녀사냥은 중세의 사회현상이다.
    • 해당 항목 참고. 오히려 근대의 시대상에 가깝다.

  • 마녀사냥은 중세에 마귀를 숭배한 사람들을 처형했다.
    • 완전히 거짓이다. 오히려 마녀사이라고 봐야 옳을 지경으로 이 당시 교황청이 심각하게 부패했고 주 사냥대상은 부잣집 과부였다. 부잣집 과부에게 악마와 검열삭제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온갖고문을 해 죽였는데 황당한 것은 이 과정에서 마녀 혐의자에게 온갖 구실로 요금을 징수했다는 점이다. 고문도구 사용료, 고문기술자 급여, 고통세(…), 고문장소 임대료, 화형에 처할때 사용하는 장작요금 등등 갖다 붙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요금을 부과했고 마녀혐의자에게 맨 마지막으로 가해진 처벌이 전재산 몰수형이였다. 이 마녀사냥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녀사냥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사죄했다.

  • 마녀사냥의 광기가 유럽 전역에서 휘몰아친 결과 800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 오늘날까지 무비판적으로 인용되는 저 800만이라는 수치는 아무 근거가 없는 유사역사학적인 수치놀음이다. 도대체 당시 유럽 인구가 몇인 줄로 생각하고 800만을 주장하는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이와 같은 선동적인 가짜 데이터들은 거의 대부분이 계몽주의 시대의 아이러니할 만큼 맹목적인 반기독교 심리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는 6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확인되는데, 물론 이 역시 결코 적은 수가 아님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800만이라는 밑도끝도 없는 드립보다는 훨씬 신뢰할 만하다.
    • 마녀사냥은 유럽 전역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단지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문화권에서만 이루어졌다. 주로 도시보다는 시골, 특히 작은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 유독 성행했으며, 그나마 시골 마을이라 하더라도 편차가 꽤 컸다. 남유럽의 경우 평온하기 그지없었는데 가장 무거운 처벌이 태형(…)이었다고 한다.

  • 개신교의 뿌리가 된 종교개혁가들은 마녀사냥을 비판하고 단호히 거부하였다.
  • 백년전쟁 등에서 영국 장궁은 플레이트 갑옷을 관통해 큰 활약을 했다.
    • 백년전쟁 초기에 프랑스 기사들이 많이 입은 쇠사슬 갑옷에는 잘 먹혔지만, 이후 플레이트 갑옷이 발달하면서 기사의 갑옷을 직접 관통하기는 어려워진다. 사실 위력은 쇠뇌가 더 좋았다. 다만 쇠뇌의 연사력은 1분당 많아야 3발이 고작으로, 장궁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장궁이 큰 활약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직접 관통되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타격이 있었고, 말은 기사만큼 철저하게 갑옷을 두르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화살에 맞고 기사를 땅에 굴려버렸기 때문.

  • 갈릴레오 갈릴레이천동설을 주장하는 종교재판소에서 물러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독백했다.
    • 해당 항목 참고. 단순히 구전되는 일화일 뿐이며 후대의 작가가 임의로 추가한 대사다. 애초에 그런 위험한 소리를 남들 보는 앞에서 함부로 나불거렸다가 잡히면 짤없이 법정모독죄가 추가될 것이므로 갈릴레이가 함부로 입을 놀리기도 어려웠다. 사실, 남들 눈치를 보며 혼잣말을 한 것이 지금까지 과연 어떻게 전해져 왔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후대의 창작이라는 답이 나온다.[27]

  • 중세 교회에서 판매했던 면죄부는 신자들의 죄를 사해 주는 기능을 한다고 선전되었다.
    • 죄 자체를 사한다기보다는 일정한 보속(satisfactio)을 통해 죄로 인해 받게 될 연옥에서의 벌을 면하게 해 준다는 의미였으며, 이 때문에 면벌부라는 표현이 더 옳다는 주장도 많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면벌부 항목 참고.

  • 서구 역사에서 사람들이 종교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비로소 해방되게 된 계기는 르네상스이다.
    • 종교사학적으로 보아 실제로 일반 대중들의 생활규범이 종교에서 떨어져나오게 된 계기는 19세기 중엽의 세속화(secularization)라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 이전에는 르네상스건 뭐건 사람들의 생활에서 교회와 신앙이 어마어마한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19세기에 세속화가 어느 정도 완료되면서부터 사람들의 생활은 점차 교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28] 그 이후로 기독교 전통이 유럽인에게 갖는 의미는 한국인에게 유교 전통이 갖는 의미와 비슷해지게 되었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최초로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하였다.
    • 11세기경 바이킹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설(이른바 빈란드설)이 전해지다가 뉴펀들랜드 지역 유적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다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우유를 줬다가 이(유당)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원주민들이 우유를 독으로 착각해서 쫓겨났다고. 이외에 이곳에서 나무를 베어 조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 오다 노부나가단철포의 발명자 / 삼단철포는 에도시대 소설에서 창작된 것.
    • 일본의 군사사 연구가인 스즈키 마사야는 오다 노부나가의 3단 철포가 허구라는 주장을 폈으며, 그의 주장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삼단철포는 에도시대 소설에서 창작된 것이다"라는 이야기 역시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중에도 선조가 "일본이 만약 조총을 3단으로 연속사격할 경우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若分三運, 次次放砲, 迭爲先後, 則何敢當哉)"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전투대형인 삼첩진에서도 조총의 연속 사격 개념에 대해 완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이같은 조총의 연속사격 시스템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오다 노부나가가 발명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전국시대 말에는 이미 삼단철포가 완성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케다 신겐은 기마병 전술의 달인.
    • 기마병이 아니라 기마보병이었다. 은 이동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전투시에는 말에서 내려서 전투했다는 것. 말안장에 앉아서 싸운게 아니라 말 등위에 서서 달리다가 싸울 때는 말에서 뛰어내려 싸우는 게 기마보병이다.

  • 명나라청나라에게 망했다.
    • 명은 이자성, 장헌충 등이 주도한 농민 봉기로 멸망했다. 이후 입성한 청은 형식상 숭정제를 추숭하는 등 명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하였다.[29] 물론 삼번의 난 이후 남명과 복명운동을 진압한건 청이 맞다. 그러나 명의 멸망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만력제의 쓰레기같은 치세이다.

  • 단두대는 기요틴이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결국 그 자신도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았다.
    • 단두대의 발명가는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이며, 기요틴은 단두대의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단두대의 초기명칭은 앙투안 루이를 따서 louisette로 불렸다. 앙투안 루이는 69세때, 기요틴은 75세때 사망했으며 둘 다 단두대랑 상관없이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독살당했다.
  • 샌드위치는 샌드위치 백작카드를 하면서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만들었다.
    • 샌드위치 백작은 노름을 할 정도로 부유하지도 않았고 백작의 취미는 폴로였다. 정작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이 남은 곳은 하와이(샌드위치 제도).

2.2. 근대

  • 에드워드 제너가 고안한 최초의 천연두 예방접종을 받은 제임스라는 소년은 도리어 20세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
    • 반백신 운동가들이 열심히 설파하는 이 거짓말은 실제 "제임스" 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 턱이 없는 일반인들을 겨냥하고 있다. 문제의 주인공 제임스 피프스(James Phipps)(1788~1853)는 65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평균 수명이 불과 40세였음을 고려한다면 도리어 장수했다고 봐야 한다.
    • 개중에는 제너의 아들이 21세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찍 죽은 것은 맞지만 사실은 폐결핵으로 죽은 것이다.

  • 나폴레옹은 키 170을 넘기지 못하는 루저였다.
    • 나라간의 측량 기준이 달랐기에 생긴 오류.

  • 다윈은 죽기 전에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 이 감동적인(?) 돌아온 탕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이는 당시 해군 제독이었던 제임스 호프 경의 미망인 호프 부인의 사기극이다.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녀가 찾은 해법이 바로 그럴싸한 스토리를 만들어서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다니는 것. 그녀는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니면서, 종교인들에겐 자신이 다윈 일가의 추적을 받고 있다고 둘러댔다. 그녀의 창작 드라마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가 사실인 듯 회자되곤 하지만, 속지 말자. 훗날 다윈의 후손들이 이 문제로 소송을 걸었다고도 카더라.

  •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 침탈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 전혀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대표적 고정관념. 경제적 실익을 원했다면 식민지로 만드는게 아니라 교역을 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뿐더러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원정비용도 안나오는 애물단지들이었다. 식민지 경영 자체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측면에서 내부불만 분산용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스마르크 같은 경우는 식민지 획득만큼 병신짓이 없다고 까다가 베를린 회의에서 마지못해 토고카메룬 등을 식민지화하기도 했다.
    • 식민지는 시장과 원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메리트가 별로 없었다. 식민지는 채산성이 없어서 투자기피 대상이었던 것은 둘째치고 수익 창출 하부구조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프랑스의 예를 들자면 무역의 대부분을 유럽열강과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교역량을 다 합쳐도 유럽과의 교역의 반의 반도 안됐다! 원료도 무역으로 얻으면 더 싼데다 산업혁명의 원료인 석탄은 정작 유럽이 주원산지.(…)
    • 정말로 이 오해가 옳았다면 왜 2차대전 이후 많은 열강들이 자기네 식민지들을 선뜻 포기할 수 있었는지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식민지 경영은 득보다는 실이 큰 실패한 사업이었는데, 식민지 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평등하게 운영하라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예외적으로 프랑스알제리베트남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는데 이는 100년 넘게 동화주의를 적용하면서 식민지에 대한 애착이 커졌기 때문.
    • 그 외에도 제국주의 열강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을 "인간으로 교화시키거나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식민지를 확장시켰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 식민지 확대 자체가 경쟁국들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용도로 쓰였다는 해석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 16세기의 저 악명 높았던 스페인의 바야돌리드(Valladolid) 논쟁도 교화나 개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짐승인가 인간인가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논쟁의 근본적인 이유는 인디언들을 가축과 같은 부류로 봄으로써 정복자들의 수익과 이로 인해 발생할 세금에 따른 에스파냐 왕국 예산의 문제가 얽혀있었기 때문.

  • 20세기 일본 제국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 대만에서 돈 좀 만진 것과는 별개로[30] 조선은 막대한 적자 식민지였다. 당장 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독부에 부임하면서 내건 공약이 총독부 재정독립 건인데, 그 뒤를 이어 하세가와, 사이토, 야마나시, 우가키, 미나미, 고이소, 아베까지 같은 소릴 똑같이 읊었으니... 게다가 식민지 시혜론을 내세운답시고 이런저런 불필요한 지출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일본은 돈만 더 버렸다. 조선을 경제적으로 예속된 보호국으로만 남겼다면 이권을 빼앗는 방식으로만 빨아먹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아예 직접 식민지화를 해 버렸으니 모든 관리비 등의 지출을 총독부가 부담하게 되었던 것.
    • 조선에서 쌀을 수탈한 것도 일본 입장에서는 크게 좋을 것이 없었다. 조선 쌀을 풀자니 일본 농민들이 통곡하고 중공업을 육성하자니 일본 재벌들 심기가 뒤틀리고 그렇다고 특산물 조금 가지고는 2천만 인구 부양이 안되고... 게다가 1930년대 이후에는 대풍년이 드는 바람에 일본 농민들의 쌀값이 값이 되어 버렸다.(…)[31] 오죽했으면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 를 시전하는 일본 농민들의 항의가 굉장한 이슈가 되어서, 모토미야 히로시의 만화 《나라가 불탄다》에서도 당대의 시대상으로 조선 쌀과 만주 쌀로 인해 농민들의 가계가 궁핍해졌다는 묘사가 나왔을 정도. 당시 일본이 산업화가 고도로 진행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실로 국가적 위기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런 얘기는 안 배운다
    • 사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당초 일제로서도 무조건 닥치고 식민지! 같은 주장이 환영받았던 건 아니었다. 합병의 형태만 해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장은 걍 식민지화였지만 일본-조선 2중제국 수립부터 독일제국 내부의 영방 국가들 수준, 영국-스코틀랜드 형태까지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일진회만 해도 뷔르템베르크 공국과 독일제국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일본제국 내부의 자치국을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32] 이토 히로부미도 사실 막판엔 일진회 주장에 동의해서 합병은 하되 공국 정도로 남겨 자치를 시키자던 입장이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고 항복하였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수학 성적이 뒤떨어졌다.
    • 본인이 아니라고 직접 인증했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쟁범죄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다.
    • 추축국이 훨씬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전쟁범죄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은 국가는 이 세상에 없다. 특히 수많은 독일 및 점령지 여자들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일이 있다. 또 드레스덴 폭격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대규모 폭격작전도 인식에 따라 전쟁범죄로 볼 수도 있다.

  • 제2차 세계대전때 추축국 소속 병사들은 전부 양민학살을 저지른 천하의 개쌍놈들이다.
    • 추축군이 끔찍한 전쟁범죄들을 많이 저지른건 사실이지만 전부 그랬을 리는 없다. 애초에 무슨 ISIL처럼 국가의 탈을 쓴 테러 연합도 아니고, 파시즘에 물든 국가의 정규군들인데 전원 미치광이로만 이루어져있다는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그저 미치광이들이 주목을 받아 유명해지고, 개념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묻혀서 그런것 뿐이다.미친놈만 주목받는 더러운 세상

  • 2차세계대전때 독일 국방군은 전부 명령을 따랐을 뿐일 억울한 젊은이들이었고 SS는 전부 유대인 죽이기 좋아하는 천하의 개쌍놈들이었다.
    • 독일 국방군도 SS만큼은 아니더라도 대규모 전쟁범죄에 어느정도 개입했으며,, 또 SS에 속해 있었다고 전부 히틀러 광신도에 양민학살자는 아니었다.

  • 독일은 일본과는 달리 2차세계대전 당시에 저지른 모든 잔혹 행위에 대하여 확실히 사죄하고 배상했다.
    • 2차세계대전때 홀로코스트와 침략 전쟁에 대해서는 사죄 및 배상을 한 것이 맞다. 하지만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에게 저질렀던 학살[33]이나 생체실험, 인권탄압 등의 잔혹 행위에 대해서는 배상은 커녕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 한마디도 없었고, 지금까지도 아예 언급 조차 안하며 그냥 묻어두려 하고있다. 또 친위대이자 자원제였던 SS의 전쟁범죄는 과장하면서 국방군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물타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홀로코스트에서는 유대인들만 죽었다.
  •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유대인들의 숫자는 크게 과장되었다.
  • 유대인 절멸을 향한 나치 독일의 광기와 비합리성이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다.
    • 도리어 유럽의 많은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극도로 근대적이고 체계화된 시스템이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다" 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풍조도 바로 홀로코스트라는 된서리를 맞아 수그러들었고, 또한 "Anything goes!" 로 흔히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도 홀로코스트와 무관하게 일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독일 학자들은 유대인의 객관적 열등함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고 연구했으며, 현대적 관료 시스템이 천만에 달하는 유대인들과 집시, 성 소수자들을 추적, 분류, 등록하게 했고, 소위 "컨베이어 벨트" 에 비견될 만한 체계적인 절멸 작업이 착착 진행된 것 역시 지나칠 정도의 냉정한 합리성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참고자료

  • 애치슨 선언을 통해 미국은 일본만을 지킬 것이며 는 미군이 안 지키는 지역이니 아시아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국제사회에 신호를 보냈다.
    • 애치슨 라인은 추후의 국제분쟁 발생시 미 육군이 투입되는 한계를 설정한 것이며, 애치슨 라인 밖의 비공산권 국가들이 군사적 위협을 받을 경우 지상군 투입을 제외한 다른 방식으로 돕겠다는 의지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 군비축소를 위해 고심하고 있었고, 향후의 국제분쟁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낙관적이었다고. 자세한 내용은 애치슨 라인 참고.

  • 세계대전 전후 유럽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는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에는 무관심했다.
  • 독일에서는 개막장 극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 아돌프 히틀러를 악마 취급하지만, 일본에서는 도조 히데키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 일본독일에 비해서 극우 세력의 깽판이 좀더 노골적이고 공개적이다보니 이런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개막장 극우들을 제외하면 도조는 좌우를 막론하고 악마 취급받고 인간 쓰레기 취급받는, 히틀러와 별 다를바 없는 처지다. 실제로 도조는 연합군의 간섭 없이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했어도 십중팔구 처형당했을거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의 전반적인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나마 베니토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도조에 비해 이탈리아 내에서의 인식이 긍정적인 편.

  • 프랑스는 전후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단죄했다.
    •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거의 학살에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모습이 좋지 않았다. 비시 정부 수뇌부의 일부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처형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독일군의 애인, 정치적 노선이 다른 레지스탕스(!)들, 저항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들로, 만만한 놈들 잡아다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봐도 될 정도. 비시 정부 당시 85만 명의 공무원들이 있었지만 징계조치를 받은 사람들은 3천 명에 불과했으며, 거꾸로 레지스탕스들이 부역자 처벌을 요구하며 봉기했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고.
    • 공식적으로 처벌된 인원은 총 4만 명인데, 이들조차도 1951년에 국가재건을 명목으로 국민투표(!)를 거쳐서 대부분 사면했다고 한다.

  • 중국이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제사해 운동(저 새는 해로운 새다) 때문이다.
    • 단정짓기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제사해 운동보다 토법고로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통킹만 사건미국이 일부러 자국의 구축함을 격침시킨 후 북베트남 소행으로 덮어씌운 사건이다.
  •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전한 것은 베트콩이 미군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 사실 군사적으로는 북베트남군이 미군에게 확실히 밀리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이유에서 미군의 철수가 결정되었던 것. 이후 이미 오래 전부터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 남베트남 수뇌부의 대규모 삽질로 인해 북베트남이 남침 통일에 성공했다.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독일이 통일되었다.
  • 일본은 아직까지도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자고 한국 측에 지속적으로 제안해 오고 있지만, 한국은 지금껏 그 셀 수 없이 많은 요구들을 모두 묵살해 왔다.
    • 독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 상당수까지도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이 한국에 정식으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요청한 건 아직까지 딱 3번 뿐이다. 그것도 최근의 일이 아니라 1952년, 1962년, 1965년밖에 없다.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후로 반백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은 단 한 차례도 더는 회부를 요청할 수 없었다. 당시 조약 내용 중에 "한일 간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외교상의 조정 또는 제3국에 의한 조정을 통하기로 한다" 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 일본 외무성 발간 자료 등에는 마치 "1952년, 1962년, 1965년 이래로 일본은 계속..." 과 같이 요청이 많이 뒤이어 온 것처럼 쓰이긴 했지만, 자기네들도 대국민용으로 "회부를 검토하겠다, 회부 요청을 고려중이다" 식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즉 한국은 이 문제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고, 독도에 군대를 주둔한다거나 분쟁지역화를 한다거나 하면 도리어 유리한 위치를 잃게 될 위험이 있다.

  • 일본에는 아직까지도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가 꽤 남아있지만, 독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제국주의 시절을 흑역사로 여긴다.
    •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제국주의 열강이였던 서양 국가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시절을 영광의 시대로 인식하며 자랑스러워하고 향수를 느끼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나마 패전을 겪은 일본과 독일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에 비하면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긍정적인 인식이 훨씬 덜한 편이다. 국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독일인들은 개막장 극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 제국주의 시절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생각하는데, 독일인들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이고, 당시에 흔한 제국주의 열강이였던 독일 제국에 대해서는 일본 못지않게 향수가 꽤 남아있다. 패전국들도 이런 마당에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말할 것도 없다.

3. 문헌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 정확한 표현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다. 해당 항목 참고.

  • 병법 36계, 즉 ‘36계 줄행랑’이란 말은 손자병법에 나온다.
    • 적어도 ‘삼십육계 주위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이란 말이 남북조시대 단도제가 한 말로 알려져 있기는 하나, 누가 처음 제안한 말인지도 불분명하고,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도 아니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은 성경에 나온다.
    • 새뮤얼 스마일즈(1812~1904)의 《자조론》이라는 자기개발서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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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애초에 이 년도가 단순히 ‘요 임금 즉위 50주년에…’라는 문구를 억지로 계산해 넣은 것이다.
  • [2] 다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삼국사기와 조합해보면, 외교적으로는 근초고왕 때 백제가 먼저 접촉했다. 왕실은 아니고.
  • [3] 세가는 제후들의 기록이고 본기는 천자의 기록이다.
  • [4] 삼국사기에서는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보았을 정도
  • [5]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삼베,모시나 이후 면화 등 천연섬유의 색상은 원래 백색이 아니다. 베이지색 정도가 원래 색이다. 당장 기능성 속옷 매장에서 유기농 무표백 내의 찾아봐라, 무슨색인가 즉 백색 직물은 염색한 것이라는 것.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흰색 셔츠 등은 표백제 등을 이용해서 표백한 것이며 형광 물질이 없을 수 없다.
  • [6] 흰옷의 경제적 문제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의 식민사관론자들의 헛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 [7] 정도전이 불씨잡변에서 신랄하게 비판
  • [8] 물론 중들의 노동 가치도 동시에 깨달아 여러 국가사업에 부려 먹히던 것도, 그럼에도 유학자들이 멸시를 거두지 않은 것도 사실.
  • [9] 현은 '나타나다'라는 의미이고, 고는 위패와 제주의 관계를 의미하고(고는 죽은 아버지의 경우 부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부는 조고, 증조부는 증조고라고 적는다), 신위는 말 그대로 혼령의 자리라는 의미.
  • [10] 때문에 만일 벼슬을 했다면 관직명이 적힌다. 만일 영의정을 지냈다면 현고영의정부군신위가 된다. 현대에는 공무원에 해당하는 직책을 역임한 경우에는 그 직책명이 적힌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수를 지냈다면 현고서울대학교수부군신위가 되고, 공무원이면 '사무관', '서기관', '주사보'처럼 직급명으로 적는다. 공무원 기준이기 때문에 '현고삼성회장신위'같은건 못 적는다.
  • [11] 이런 주장은 주체교의 영향도 크다. 일이 벌어진 곳이 주체교 총본산이니...
  • [12] '...기독교의 만연도 국민의식의 마취에 일익을 담당하는것 같다. 사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무기는 주류인것 같다. 평생 술을 입에 대보지도 않은 사람도 기독교인이 됨과 동시에 적어도 한 차례는 성 예수의 신성한 피가 담긴 포도주라하여 의무적으로 음주를 하게 되는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예수의 피니, 성령이 담겨 있는 것이니 하여, 인간의 참다운 이성의 힘과 판단력을 종교의 힘으로 상실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학자들이 한 국가의 도덕관을 자기네들의 종교적 신조에만 의거해서 판단하고, 유도하는 이상, 참다운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종 주류의 범람과 그들의 과도한 음주 기질이 도덕성의 파괴를 촉진시키고 있다...전국 어디를 가도 술병을 손에 든채 취기에 빠져 있는 한국인을 볼 수 있다...어느날 저녁, 한 선교사는 한국인 남녀를 한 장소에 모아 놓고는 우선 술잔부터 돌리면서 선심을 쓴다. 원하는데로 술을 마시게 한다. 모두가 취기에 빠진다. 다음 날 아침에는 또다른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줄을 선다. 한 잔의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해, 입교한 자는 등록 카드에 기록이 되고 곧 바로 술이 나온다. 이 보다 더 입교에 쉬운 종교가 어디 있으랴...한국인의 경우는...(기독교로의)개종에 비례해서 악행의 만연도 심해지고 있다..'#
  • [13] 양형성체라고 하여서 포도주까지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게다가 20세기초에는 더더욱 드물었다. 설령 양형성체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체를 포도주 찍어서 먹는 것이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고 싶어서 들어가기에는 가톨릭은 영 좋지 않은 종교이다.
  • [14] 한국의 개신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개신교 자체가 수많은 종파들의 통칭이다. 즉 종파마다 신학적 스팩트럼이 다양하며 한국에는 음주를 허용하는 종파 역시 당연히 있다.
  • [15] 애초에 한국이 원하는 것은 돈 몇푼어치가 아니라 진심어린 반성과 참회다. 36년간의 고통은 결코 돈으로 돌려받을 수 없다.근데 넷 우익들은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이 또 함정.
  • [16] 명동 성모병원, 종로 YMCA, 연세대 학생회관 등을 건축한 인물.
  • [17]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 [18] 자세한 건 김영택 박사가 쓴 박사학위논문 내용의 일부 참고. #
  • [19] 즉 우발적이거나 마지못해 군사력이 투입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는 뜻.
  • [20] 즉 계엄군 측이 먼저 발포했다고 대법원이 인정했다는 뜻.
  • [21] 즉 북한군의 개입이나 다른 안보위협 정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대법원이 부정했다는 뜻.
  • [22] 즉 광주에서의 학살이 국익이나 안보와 같은 대승적 차원에서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도리어 전두환 개인의 권력욕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잔혹하게 제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는 뜻.
  • [23] 천안함 사고 직후 민주당 추천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신상철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 [24] 사실 순수하게 황조만 따지자면 비잔티움도 몇 등분 넘게 난다. 대충 떠오르는 것만 해도 유스티니아누스 쪽, 헤라클리우스 쪽, 마케도니아 황조, 콤네노스 황조, 앙겔로스 황조, 팔라이올로구스 황조라든지.
  • [25] 구경거리라는 의미도 있다.
  • [26] 국제 과학사학회 회장 로널드 넘버스 등
  • [27] 실제로 적지 않은 유명인들의 어록들이 그런 식이다. 목격자가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했던 말이 현대까지 이어졌다면 (본인이 "나 이렇게 간지나게 한 말씀 했다" 고 자랑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어떻게 검증될 수 있겠는가?
  • [28] 바로 이 때문에 유럽 지식인들은 종교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미권 지식인들에 대해 "너네는 아직도 19세기를 살고 있냐?" 고 까기도 한다. 어찌보면 세속 국가임에도 종교의 영향력이 상당한 미국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 [29] 애초에 청의 홍보용 역사서인 만주 원류고만 보더라도 청의 건국명분은 명을 멸망시킨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30] 대만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가치가 있었던 데다 일제가 사탕수수 농장 경영으로 재미를 봤다.
  • [31] 1930년경 조선 쌀 한 섬의 값은 36원이었는데, 5~6년 후에는 한일 양쪽 모두 풍년으로 인해 겨우 16원이라는 반값도 안 되는 수준으로 대폭락했다.(…)
  • [32] 일진회는 일본에 대해 굉장히 나이브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어떤 인간은 죽을 때 "일본한테 속았다!" 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도리어 위정척사파가 일본의 침략의지를 간파한 것이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
  • [33] 나미비아 헤레로족 학살이나 탄자니아 마지마지 반란 유혈진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