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last modified: 2020-06-11 22:06:49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김대중의 체포와 신군부의 사건 조작
3. 국제적인 김대중 구명 운동과 미국 망명
4. 귀국과 가택연금, 그리고 사면
5. 사건이후
6. 반대세력의 왜곡

1. 개요


1980년에 있었던 신군부의 내란조작 사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는 김대중과 민주화운동가 20여 명이 북한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획책했다라고 발표했다. 당시기사

내란음모조작1.jpg
[JPG image (Unknown)]

내란음모조작2.jpg
[JPG image (Unknown)]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신군부는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플랜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당시 학생 운동권과 재야에서 비상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국회에서도 비상계엄령 해제를 논의하는 본회의 개최를 시도하자 당시 전두환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비상계엄령의 확대를 획책했다. 비상계엄령이 해제되면 군인인 전두환이 정치에 개입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계획은 이미 1980년 초에 신군부 안에서 나온 시국수습방안에 따른 것이었다. 시국수습방안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초헌법적 기관인 보위 설치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고 신군부 집권에 방해가 될수 있는 학생 운동권과 재야 민주화 인사등에 대한 체포계획도 이미 수립되어 있었다. 전두환은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인 이학봉에게 지시하여 체포계획을 수립하게 했고 이학봉은 5.17 쿠데타 하루 전인 5월 15일 보고해 전두환의 최종 재가를 얻어냈다. 이때 체포대상자는 크게 두 부류로, 국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학생 운동권 인사들과 재야민주화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이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김대중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서 공화당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김종필이 핵심적인 인물로 꼽혔다.

김대중 본인도 위험을 감지했는지 5월 13일 기자회견에서 "북한 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여, 학생 운동권의 질서 유지를 당부했다. 서울역 회군은 이런 김대중의 당부가 영향을 미쳤다는게 대체적인 견해다.

재야 민주화 운동단체인 국민연합은 5월 16일 성명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 해제와 전두환의 공직 사퇴, 명확한 정치일정 공개등을 요구했다. 당초 국민연합은 5월 18일까지 정부가 응답할 것을 촉구했으나 선언문 초안을 받아본 김대중은 국회에서 5월 20일에 계엄령 해제를 논의하는 본회의가 열리는 만큼 이를 5월 22일로 연기하도록 주문했고 계엄군에게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내란음모로 몰아갈 우려가 있으니 삭제할것을 권고했다. 이처럼 김대중은 신군부가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명분을 주지않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었다.

2. 김대중의 체포와 신군부의 사건 조작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공식 발표되었고 신군부는 병력을 동원해 이미 작성된 검거대상자들을 체포하려 나섰다. 김대중은 학생, 노조의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수경사 헌병단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초 신군부는 김대중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소요를 사주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5월 18일, 광주가 신군부에 항거하자 이를 이용해 김대중을 내란음모를 획책했다고 몰아붙혔다.

신군부는 김대중의 최측근인 김상현을 족쳤는데 김상현이 전남대 복학생 회장인 정동년과 접촉했고 5월 14일에 김대중이 직접 정동년을 만나 500만 원을 주고 광주에서 시위를 일으키도록 배후조종했다고 몰아갔다. 그러나 이것이 터무니 없는 것이 이미 김대중은 5월 17일에 구속되었고 정동년도 예비검속으로 같이 구속된 판국이었다. 실제 5.18 민주화운동에서 광주의 학생운동권의 중심세력인 전남대 학생 지도부는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김대중이 배후에서 시위를 사주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신군부는 오직 자백만을 증거로해서 내란음모로 기소했다. 실제 신군부는 김대중을 비롯한 체포자들을 두 달 동안 혹독하게 고문해서 결국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자백을 얻어냈다. 그리고 구체적 증거없이 재판부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오늘날 같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얻은 것이 인정될 수 없지만 80-90년대만 해도 자백이 가장 중요한 증거로 여겨지던 풍토도 이에 한몫을 했다.죄가 없으면 자백하겠냐는 화려한 논리의 오류

당사자들 증언증언링크
내란음모조작3.jpg
[JPG image (Unknown)]


당시 변호인의 변론변론링크
내란음모조작4.jpg
[JPG image (Unknown)]


당시 자백을 했던 사람들이 말하는 고문증언들
1988년11월30일기사
12월7일기사. 심지어 재판도중에도 협박을 받았다.
11월21일기사.
심재철의 증언도 조작되었다. 심재철증언

그뿐만 아니라 대법원 판사도 고문하며 공포분위기를 자아냈다. 동아일보출처

결국 1981년 1월, 김대중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3. 국제적인 김대중 구명 운동과 미국 망명

전두환은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기세였지만 국제사회는 김대중에 대한 구명을 촉구하면서 전두환을 압박했다. 특히 김대중이 최종판결시 한 최후 진술에서 "나는 먼저 죽지만 먼저 죽은 나를 생각해서 이땅에서 다시는 정치보복이 없도록 해달라"라고 한것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으로 김대중에 대한 동정여론이 확산되었다.

나름대로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김대중의 사형을 막기 위해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를 파견해 김대중을 구명할것을 전두환에게 요구했다. 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김대중의 구명운동에 앞장섰으며 후에 미국 부통령이 된 앨 고어 상원의원도 김대중의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두환에게 발송했다. 독일에서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직접 마왕을 상대하는 기백을 보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두 차례 서한을 보내 김대중을 선처해달라고 촉구했다.

이런 국제적인 압력에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시 20년형으로 감형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우회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심지어는 일본[1]까지도 북한과의 수교를 주장하면서 전두환을 압박하자 결국 1982년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김대중을 석방해 미국, 일본과의 외교관계 마찰을 막아야 한다는 건의를 했고, 전두환은 1982년 광복절 특사에 김대중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강력한 반발로 이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계속된 압력에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을 신병치료라는 명분으로 미국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노신영을 통해 이희호 여사에게 제안이 전달되었다. 김대중은 이를 거부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탄압받는다는 것때문에 고심 끝에 결국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1982년 12월, 김대중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자유의 몸이 된다.

4. 귀국과 가택연금, 그리고 사면

그러나 1985년 1월 김대중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 의사를 밝힌다. 여러 주변 인물들은 김대중과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필리핀의 민주 투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1983년에 귀국하자마자 피살된 점을 상기하며 귀국을 말렸지만, 마침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도 있고 해서 김대중은 귀국을 강행한다.

이 때 전두환이 격노하고[2] 최창윤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교도소에 재수감하여 잔여 형기를 집행하겠다."라고 밝혔는데, 이에 백악관에서 청와대를 향해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4월로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 및 정상회담을 취소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할 정도로 한미 관계가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청와대쪽에서는 최창윤 비서관의 인터뷰가 개인 발언일뿐이고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가택연금만 시키겠다고 꼬리를 내렸으나, 미국 국무부에서는 한국 내 민주주의 위기를 주제로 한 강연에 김대중을 초청하는 등 계속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무언의 압박을 했다. 게다가 김대중이 귀국할 때에는 연방 하원의원인 토머스 폴리에타, 에드워드 페이언[3]과 전 엘살바도르 주재 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츠, 언론인이자 평론가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4] 등의 여러 미국 저명인사들이 비행기에서부터 입국장까지 김대중을 에워싸고 이동했다.[5]

이를 전혀 예상치 못한 안기부 요원과 경찰들은 미국 인사들에게 무력을 행사해가며 김대중 부부를 강제로 버스에 태워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갔고 (...)[6] 이에 열받은 미국 인사들은 외신 기자들을 향해 "한국 경찰이 김대중을 구타하는 것을 목격했다."(토머스 폴리에타), "우리한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데 과연 서울올림픽 때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올 수 있겠나?"(로버트 화이츠) 등의 인터뷰를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백악관의 지시로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직접 김대중을 데리고 동교동 자택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안기부의 방해로 미국 외교관들이 제 시간에 출발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안기부 요원과 경찰들이 김대중을 억지로 끌고간 점까지 밝혀지면서 미국 대사관측이 이원경 외무장관에게 항의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국무부까지도 직접 항의를 하면서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한미관계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그러나 4일 후 치러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예상을 깨고 67석을 얻어 제1 야당으로 급부상, 이후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가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강력히 요구하고 전두환 정권 역시 지난 4년간의 통치 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감지하면서 김대중을 전격적으로 연금에서 풀어준다. 단, 형 집행정지 기간까지 면제하고 동시에 공민권을 회복하는 사면복권 조치만큼은 절대로 안된다고 버티고 신한민주당이 한달 만에 결국 물러나면서 정치 활동은 여전히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이 완전히 자유로워진건 6.29 선언 이후.

5. 사건이후

1995년,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당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이 재심을 받을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중에는 여러 이유로 재심을 미루다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에 재심을 청구해 2004년 무죄선고를 받았다.
무죄선고 뉴스

6. 반대세력의 왜곡

그런데 5.18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이들에 의해 같이 왜곡되고 있다.

  • 김대중이 실제 내란음모를 한건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대통령 된 이후로 권력의 힘으로 이를 은폐했다.

→ 우선 권력의 힘으로 그걸 숨겼다는 논리 자체가 허술하다.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독재자들조차 과거 자신이 명령한 학살, 고문 등의 인권유린을 완벽히 은폐하지 못하는데, 그들보다 권력이 약한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과거 자신이 했던 만행을 완벽하게 감출수 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봐도 불가능하다. 법적으로 반대세력을 악으로 몰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그저 행정부의 수장에 불과한데?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국가기관 위에 군림하는 빅 브라더다. 또한, 대통령이 된 다음 권력의 힘으로 은폐했다고 하는데, 그럼 대통령 되기 전에는 은폐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짜 김대중이 내란음모를 꾸몄다면, 대통령 선거때 상대 후보 입장에서 이것만큼 김대중을 공격할 좋은 건수도 없다. 내란음모 건으로 '보세요, 이런 사람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합니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면서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당시 상대 후보측에서는 내란음모의 ㄴ자도 꺼내지 않았다. 즉, 김대중 내란음모 어쩌고는 김대중 반대파들도 정쟁의 건수로 안 쓸 정도로 허황된 소리란 뜻이다.

  • 1980년의 법원은 실제로 김대중이 내란음모를 했다고 판결했으며 상고심에서도 원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판결문을 보면 내란음모죄는 세부 계획이 없더라도 인정될 수 있고, 모든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원심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2번의 법적 판단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1980년의 판결은 정당하다.

→ 그 근거가 고문으로 만든 자백이니 판결의 근거부터가 틀렸다.

  • 고문 받았다는 증언 자체를 신뢰할 수가 없다. 내란음모 사건의 김대중과 일당들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상황에서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증인들이 그 당시 고문이 있었다고 하는 것 만으로는 신뢰 있는 증언이라고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내란음모 사건에서 다루는 증언은 1980년 당시에 했던 자백으로, 그 이후의 증언만으로는 1980년의 자백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 애초에 내란음모 판결이 그 '고문받았다고 증언한 사람'의 자백을 근거로 판결한 것이다. 애초에 고문에 의한 자백이 이루어졌음을 부정한다면 마찬가지로 김대중의 내란음모 자체도 부정되게 된다.

  • 사형판결을 받은 뒤 김대중은 해외로 도피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에게 반성문을 썼다. 이는 곧 자신의 모든 범행을 인정하며, 자신이 반대하던 그 독재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 위의 잘못된 판결에 의해 수형생활 중이었던 피고인의 사정상 해당 반성문은 강요로 쓰여졌다고 보아야 하고, 강요로 쓰여진 반성문은 인정될 수가 없다.

  • 김대중은 실제로 예비내각을 만들었다. 이 예비내각 명단을 보면 교육, 경제, 통일, 노동 등 각 정부 부처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만일 김대중의 내란이 실현되었다면 이들은 각 부처의 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 민주제도연구소 명단 은 있어도 예비내각 명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문화', '언론사회', '종교교육', '민족재생', '민주정치', '도의정치' 와 같은 정부 부처는 존재할 수가 없고, 내각을 구성한다고 하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국방부'나 '법무부' '외무부'와 같은 부서는 보이질 않는다. 이 세 부서는 권력 장악을 위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부서인데도 말이다.

  • 그 당시 미국이나 일본 모두 김대중에 대한 사형판결이 부당했다고는 하지 않았었다.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은 정당한 법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것에는 양 국 모두 동의하였다. 다만 김대중에 대한 사형은 너무 과하다는 것이 두 나라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김대중을 석방한 것이다.

→ 사실관계를 오도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한 적이 없다.

  • 그 당시 북한은 김대중의 석방을 주장했다. 만일 김대중이 정말 결백하다면 왜 북한에서 김대중의 석방을 주장하였겠는가? 실제로 김대중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민통, 조총련과 같은 친북단체를 동원하면서까지 김대중의 석방을 주장했던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북한의 선전선동전술에 넘어가는 일이다. 북한에서 구명운동을 해 봐야 역효과만 난다는 것은 북한 자신이 더 잘 아는 일일 것이다. 오히려 북한에서 이를 역이용하여 김대중을 사형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의 뜻대로 움직일 뻔 했던 위기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실재하였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
  • [1] 이때 일본의 보수 작가인 시바 료타로까지 스즈키 젠코 수상에게 "김대중씨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는 서한을 보내 김대중 구명운동에 동참했다.
  • [2] 1982년에 석방해줄 당시 김대중이 미국에서 조용히 지낸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작성했었다.
  • [3] 참고로 두 사람은 서로 당적이 달랐다.
  • [4] 전투적 무신론자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히친스 바로 그 사람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 [5] 한마디로 인간 방패를 자청한 것이다. 제 아무리 전두환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한들 감히 미국인을, 그것도 미국의 정치인을 공격하지는 못할거라는 계산이 깔린 것이었다.
  • [6] 이런 표현을 붙인게 괜한 드립이 아니다. 전두환 정권 자체가 미국의 지원 덕분에 광주에서의 유혈 진압을 뒤로 하고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정권 관계자들이 미국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놓고 미국에 개기는거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정부 관계자들은 이미 가택연금 외에는 아무런 공격을 않기로 했으니 김대중이 귀국하는 즉시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가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인들이 에워싸고 있으니 당황해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버린 듯.